옛 농사,
옛 종자를 이어나가다

토종씨드림 변현단 대표

글 ㅣ 김주희사진 ㅣ 전예영
씨앗의 방주 스발바르 종자보관소, 아사의 위기 속에서도 연구원들이 종자를 지켜냈던 바빌로프 식물산업연구소를 보면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대부분의 식물이 종자로 번식하는 상황에서, 농업이 꾸준히 이어져올 수 있었던 것은 씨앗을 지켜내려는 사람들의 수많은 노력 덕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씨앗 보관소의 역할을 넘어 우리 토종 종자를 보관·번식시키고 보급하는 단체가 있다. 바로 비영리단체 토종씨드림이다.

토종종자,
농부들에게 종자권을 돌려주는 힘

토종씨드림 변현단 대표
미스김 라일락, 구상나무, 청양고추의 공통점이 있다. 원래 우리나라를 원산지로 하는 식물들이었지만 외국 기업이 유전정보를 보유하고 있어 우리나라로 종자를 들여오기 위해서는 로열티를 내야 하는 대표적인 식물이라는 점이다. 한편 2010년에는 다른 나라의 유전자원을 이용해 발생한 이익을 자원 제공국과 공유해야 한다는 내용의 나고야 의정서가 채택되었다. 종자전쟁의 시대에서 다른 지역의 토종 씨앗을 이용해 그 지역의 생물 다양성을 해치는 것을 방지하고 발생한 이익을 공유해야 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토종 종자를 미리 관리하고 더 나아가 재배를 확산시키는 토종씨드림의 활동은 종자 주권을 지키는 가장 기본적인 활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8년에 토종씨드림을 시작할 때는 전국에서 50명으로 시작했어요. 당시에는 토종씨앗을 수집하고 보급한다는 것 자체가 생소한 일이었죠. 매달 정기모임을 가지고 40개 지역에서 토종씨앗 모임을 가지면서 지금은 회원이 2만 명을 넘겼어요. 소비자와 도시농부 등이 관심을 가지고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매년 1~2개 시군을 돌아다니며 모은 종자가 7,500점에 달한다. 그러나 토종씨드림의 종자가 진짜로 빛을 발하는 부분은 따로 있다. 바로 토종씨앗을 보급하는 활동을 통해 농부에게 종자권을 돌려줄 수 있다는 점이다. 전통 농업에서는 농부가 농사를 지어 거둔 수확물 중 종자를 보유함으로써 그 지역에 잘 적응한 종자들을 꾸준히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현행 종자산업법상 씨앗이나 모종을 파는 것은 종자관리사나 종묘사에 한해서만 가능하다. 예전에는 농부가 씨앗의 주인이었지만, 지금은 종묘사에서 씨앗을 사야 하는 소비자의 위치로 변한 것이다.
“식량증산이라는 이름 하에 다수확 방식으로 농업이 진행되면서 농부들이 토종씨앗을 뒤로 하고 개량된 씨앗을 쓰게 되었죠. 그런데 지금은 식량이 풍부한 시대에요. 그렇다면 수확량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음식, 생태순환적인 음식에 초점을 두어야 하죠. 그런 점에서 토종씨앗은 개량씨앗과는 달리 천편일률적이지 않고 되물림 될 수 있는 종자라는 점에서 강점이 있어요.”
토종씨드림

소농들의 섞어짓기,
건강한 농업의 시작

토종씨드림 변현단 대표
현재 변현단 대표는 감자 15종, 콩 30종을 밭에서 키우고 있다. 계절별로 심는 농작물이 다 다르지만 한가지 지켜지는 것이 있다면 꼭 혼작을 한다는 것이다. 고추 옆에는 들깨를 심고, 강낭콩 사이에는 토마토를 심는 식이다. 한가지 품종이 일사불란하게 밭을 채운 일반적인 농사의 모습은 볼 수 없다. 작은 밭 안에서도 옹기종기 제각기 다른 식물들이 터를 잡고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생태계와 같다.
“고추에는 담배나방벌레가 많이 생기는데 그 옆에 참깨를 심으면 담배나방벌레가 접근을 할 수 없어요. 농서에는 없는 정보지만, 제가 발견하고 다른 사람들이랑 나누었죠. 식물은 1년을 산다고 쳐도 벌레는 한살이 과정이 짧기 때문에 농약을 쳐도 그 농약을 이겨낼 수 있는 내성을 가진 벌레가 또 생기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궁합이 잘 맞는 작물들끼리 혼작을 하는 것이 꼭 필요해요. 한 번은 토마토와 두벌강낭콩을 같이 심어봤어요. 두벌강낭콩은 습기에 약해서 비가 오면 곰팡이가 잘 발생하거든요. 그런데 키가 큰 토마토가 비를 막아주니까 습기가 안 차면서 둘 다 잘 자더라더라고요.”
토종 씨앗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농사 방식도 토종으로 돌아갔다. 발효거름을 만들어 뿌리고, 밭작물 사이 사이는 비닐을 덮은 것이 아니라 풀을 덮어 온도와 습도를 조절한다. 땅에 빗물이 스며들 수 있으면서도 퇴비들이 자연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벌레가 쉽게 생기지 않는다.
“물론 이 작물들이 항상 다 잘 자라는 건 아니에요. 재미있는 것은 강화도가 원산지인 토종 콩은 그 일대에서만 재배가 잘 되지 전남이나 경남에서 심으면 잘 크지 못해요. 홍천의 청춘감자도 그런 경우인데요. 하지에 캐면 새파란 빛을 띠고 있어 청춘감자라고 부르는데, 곡성에서 길러보니 유난히 알이 작게 크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지역의 품종이라도 기후나 지역 적응을 통해 종자를 다양화시키는 실험을 계속해 나가고 있어요.”
이상기후변화가 점차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상황에서 토종씨앗에 걸게 되는 기대도 점차 커지고 있다. 토종씨앗을 다양하게 심었을 때의 장점은 각각의 종자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기후에 맞게 살아남는 종자가 있다는 것이다. 큰 비가 오거나 가뭄이 심하게 오더라도 생태계가 지속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 토종 씨앗을 여러 군데에 보급하기 때문에 한 지역에서는 해당 종자가 제대로 생육하지 못했더라도 다른 지역에서는 그 종자가 살아남을 가능성도 있다. 단순히 토종 종자를 보관만 하는 것이 아니라 농민들에게 농사법과 함께 보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전에는 토종 종자의 중요성이 탁상공론에서 멈추는 경우도 있었지만 다행히 지금은 정부나 민간에서도 토종 종자를 활용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들이 이어지고 있다. 국가에서 유전자원의 중요성에 대해서 꾸준히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토종 종자의 보급과
수요 창출 꾸준히 진행해

토종 종자를 전국 각지에서 얻어와도 이 종자들이 다시 농부들에게 나눠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참외 세 알, 오이 다섯 개가량의 소량나눔인 경우엔 나누기 전에 증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1차 특성 조사를 하고 잎은 어떻게 자라는지, 맛은 어떤지 한알씩 먹어보기도 한다. 이렇게 한 해 농사로 증식이 충분히 된다면 그 다음에 보급을 하지만, 증식을 했는데도 씨앗이 적은 경우에는 2차 증식까지 거친 뒤에야 보급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증식된 종자 중 상업적으로 보급에 성공한 작물들도 있다. 남도참밀의 경우 3차 증식까지 한 뒤에야 농부들에게 나눠줄 수 있었다. 수제비나 전 등을 만들 때 훌륭한 맛을 낸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많이 찾았고, 지자체에서 농산물 브랜드를 만들고 싶어할 때 권하는 작물이 되었다. 한살림과 같은 협동조합에 보급하는 경우도 있다. 앉은뱅이 밀이나 팥 등을 로컬푸드로 만들면서 음식문화 복원이나 브랜드 구축 등도 함께 진행하곤 한다.
“스타벅스에서 판매하는 제품 중에 참깨가 들어간 것도 있는데, 고소한 맛이 강한 참깨를 원했어요. 그래서 해당 품종을 군 차원에서 소득종자로 선택해 기르게 하고 스타벅스에 납품할 수 있도록 연계하는 역할을 했죠. 특성조사와 증식을 하는 과정에서 자료도 만들어지니까 이런 정보들을 공유하기도 하구요.”
이처럼 공익을 위한 활동을 하지만 순전히 민간 차원에서 진행하고 있다. 돈을 보고 이런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종자를 보존하고 전통 농업문화를 지켜나가는 의미에서 진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017년부터 시작했던 전국 토종 씨앗지도, 수원과 광주 등지에서 토종 종자 재배법과 보존법 등을 교육하는 토종학교 운영 등을 통해 연대협력을 구하기도 한다. 토종 종자를 보존하고 이를 이용해 농사를 짓는 농업인들이 대체로 고령인 터라 더욱 이를 물려줘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다. 우리나라의 다양한 종자들이 풀뿌리처럼 질기게 살아남아 사람들에게 키워지는 것, 그것이 변현단 대표가 바라는 그림 중 하나다.
토종씨드림 변현단 대표

토종씨앗을 다양하게 심었을 때의
장점은 각각의 종자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기후에 맞게
살아남는 종자가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