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은뱅이 밀 이야기

전 세계가 주목하는 토종 우리 밀

글 ㅣ 이승호
우리 토종 밀은 일찍이 우리 땅에서 사라졌다.
한국전쟁 후 미국의 원조로 수입 밀이 밀려들어오면서 토종 밀의 수요는 계속해서 줄었고,
1982년 밀 수입 자유화가 이루어지면서 우리 토종 밀이 설자리는 사라졌다.
그렇게 어려운 시기를 보내던 우리 토종 밀이 한 순간에 전 세계적의 주목을 받는 사건이 벌어진다.
세계 기아 문제를 해결할 대안으로 떠오른 앉은뱅이 밀의 활약 덕분이다.

우리 역사와 함께해 온
앉은뱅이 밀

앉은뱅이 밀
앉은뱅이 밀은 키가 작고 대가 단단하다 하여 불린 이름으로 다 자라도 50~80cm 정도로 작다. 덕분에 거센 바람이 불어도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앉은뱅이 밀은 알이 작고 껍질이 얇아 서양 밀보다 수확률이 좋고 병해충에 강하다. 일반 밀가루에 비해 단백질 함량이 낮아 소화가 잘되며 특유의 향이 강해 개성 있는 맛을 연출하기에 제격이다.
앉은뱅이 밀의 역사는 우리 한민족의 역사라 불릴 만큼 오랜 시간 동안 우리 조상과 함께 해왔다. 재배의 시작은 삼국시대 이전인 기원전 300년경으로 추정되며, 평안남도 대동군 미림지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밀 유적이 발견되었다. 앉은뱅이 밀은 고려 시대까지 잔치에서나 먹을 수 있는 값비싼 식재료로 대우를 받았다. 조선 시대에 들어 앉은뱅이 밀의 경작지가 크게 늘면서 서민 음식으로 탈바꿈했고, 희고 긴 모양 때문에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앉은뱅이 밀에게 고난이 찾아온 것은 한국전쟁 이후다. 전쟁을 마치고 미국의 식량 원조로 조금씩 한국에서 자리를 잡아간 수입 밀은 1960년대 들어서는 값싼 수입 밀이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밀 소비 증가와 함께 우리 밀 시장을 점령해 갔다. 앉은뱅이 밀은 값싼 수입 밀에 밀려 생사기로에 서게 된다. 1982년 밀 수입 자유화와 1984년 정부의 밀 수매가 중단되면서 그나마 명맥을 이어오던 앉은뱅이 밀과 우리 밀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1991년 농업인과 소비자 주도로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이 일어나면서 우리 밀은 다시금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앉은뱅이 밀에 대한 관심은 아직이었다.

녹색혁명의 주역으로
돌아온 앉은뱅이 밀

앉은뱅이 밀
우리나라에서 앉은뱅이 밀이 사라져가고 있던 시기, 해외에선 앉은뱅이 밀이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앉은뱅이 밀을 교잡한 미국의 농학자 노먼 볼로그(Norman Ernest Borlaug)가 세계 식량 증산에 기여하여 녹색혁명을 이끈 공로로 1970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국내에 자세히 알려진 것은 최근이기에 미국 밀이 우리 앉은뱅이 밀의 유전자를 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노먼 볼로그가 교잡한 앉은뱅이 밀의 또 다른 이름은 ‘소노라 64호’로 일제강점기 일본의 소노라가 개량한 ‘농림10호’와 멕시코 재래종을 교잡한 품종이다. 소노라 64호는 앉은뱅이 밀의 특징인 높은 생산력과 강한 생명력을 그대로 가져가는 품종으로 척박한 땅에서도 번식력이 좋아 이를 도입한 국가들은 수많은 기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앉은뱅이 밀의 활약은 멕시코에서도 이어졌다. 과거 밀 수입국이었던 멕시코는 앉은뱅이 밀 도입 후, 밀 생산량이 3배 증가하며 주요 밀 수출국으로 성장했다.
앉은뱅이 밀의 종주국인 우리나라에서는 그 명맥이 끊겼다가 2012년 백관실 진주 금곡정미소 대표가 보존하고 있던 앉은뱅이 밀을 안완식 전 농촌진흥청 연구관에게 알리면서 대중화 계기가 마련됐다. 이후 앉은뱅이 밀은 사라질 위기에 처한 음식과 종자를 찾아 기록하고 널리 알리는 글로벌 프로젝트 ‘맛의 방주(Ark of Taste)’에 2013년 등재되었으며, 지속적으로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현재는 국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우리 토종 밀로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