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결같은 꿋꿋함의 상징
울진 금강송 산지농업

글 ㅣ 김희정
다른 나무들에 비해 금강송은 한층 격을 높게 쳐주는 경우가 많다.
표피는 얇으면서도 재질이 단단하고, 생장이 느린 편이라
나뭇결이 치밀하고 뒤틀림이 적어 목재로 쓰기에 가장 적합한 소나무이기 때문이다.
이런 금강송이 자라는 지역은 봉산, 혹은 금산 지역으로 지정해 소나무의 반출을 엄격하게 감독하곤 했다.
울진도 예외가 아니다. 1680년 숙종이 소광리 일대에 황장금표를 세우고
1982년에는 산림청의 천연보호림으로 지정되면서 금강소나무 군락지는 꾸준히 보존되고 있다.

아늑한 소나무 숲,
공동체의 노력 아래
뭍 생물의 터전이 되다

솔방울
금강소나무 군락지는 대부분 비포장도로로 접근해야 하며 일부 주민의 경작지를 제외하면 출입이 통제된 경우가 많다. 사람의 발도 쉽게 닿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이 일대는 동물이나 식물 모두 종 다양성을 관찰하는 데 적합한 터전이 되어왔다. 멸종위기야생동식물 I급인 수달과 산양을 비롯해 멸종위기야생동식물 II급인 담비며 삵도 이 일대에서 서식하는 것이 확인되었을 정도다. 특히 수달은 수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산양은 암반지대에서 서식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멸종위기종인 맹금류 개체가 자주 관찰되는 등 건강한 생태계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소광리 일대의 금강송을 지키기 위한 노력도 이러한 생태계를 지키는 데 좋은 영향을 주고 있다. 이 일대는 오래된 나무의 비율이 높아 지속적인 관리와 후계목 양성이 꼭 필요했다. 현재 지속 가능한 금강송 숲을 조성하기 위해 어린 나무를 키워내려는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솔 씨앗이 자연스럽게 자라날 수 있도록 주변의 환경을 최대한 맞춰주는 천연하종갱신사업이 그 첫 번째 경우다. 이와 함께 인공 조림으로 금강송을 키우기 위해 가지치기, 솎아베기 등 숲 가꾸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 내 숲 가꾸기 대상지가 현재 2,274ha로 확대 조성되고 있으며 향후 낙동정맥 금강소나무 군락지로 확대할 예정이다.
산에서 나는 각종 약초와 산나물의 임산물에 의지하며 살아왔던 것이 이 일대 주민들의 생활이었던 만큼 금강송을 지키기 위한 노력도 자체적으로 이루어졌다. 현재까지 확인된 송계로 울진군 북면의 두천리말래와 주인리 면전, 소곡1리 소야 등이 확인되었다. 가장 큰 활동으로는 산불과 밀렵, 무단 벌목을 감시하는 것이 있다. 봄과 겨울 등 건조한 시기에 마을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순번을 정해 하루에 두 사람씩 금강송 군락지를 둘러보며 산불 감시활동을 하는 식이다. 대신 마을 산에서 나오는 송이 채취권을 입찰하고 돈을 받아 회원들과 마을 공동체를 위해 사용하는 식으로 이익을 나눈다. 반면 국유림에서 송이를 채취하는 경우도 있다.
두천리 안말래마을이 대표적이다. 본래 마을의 공동소유였던 금강소나무가 자라던 산을 2002년 국가에 소유권을 이전하며 송이 채취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요청한 경우다. 이렇게 국유림이 된 곳에서 송이를 채취할 때는 마을 사람들이 함께 공동으로 작업을 하여 소득도 공동으로 나눈다. 소득의 일부는 산림청에 납부하는데 이 돈은 소나무 묘목을 심고 송이가 더 잘 자랄 수 있게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는 일에 쓰인다.

금강송을 지켜온 사람들,
사람들을 먹이는 금강송

금강송 주변에서 나오는 여러 식재료들은 겨울이 지나 보릿고개를 넘기는 춘궁기에 산촌 사람들을 먹이는 약식이 되었다. 특히 솔잎은 생으로 따서 천천히 씹어 먹으면 피로가 풀린다고 하여 심마니들에게 비상식량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소나무의 껍질을 벗겨내서 나오는 하얀 속살인 송기를 날것으로 먹거나 가루를 내어 떡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송기를 벗겨내 두드린 뒤 밀가루를 묻혀 밥과 함께 쪄먹는 식으로 한 끼의 양을 늘려 먹는 식으로 배를 채우는 경우도 있었다.
반면 소나무 뿌리 아래에는 복령이 자라곤 했다. 복령은 죽은 소나무 뿌리에 고구마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자라기 때문에 적지 않은 양을 채취할 수 있었다. 바삭하게 부서지는 소나무 그루터기에서 뿌리가 뻗은 방향으로 쇠꼬챙이를 찔러내다가 질감이 다르게 느껴지는 곳의 땅을 파는 식으로 채취했다. 속살이 부드러워 껍질을 벗겨 속살을 바로 먹을 수 있어 허기를 달래는 데에도 좋았다. 가정에서는 복령을 가루로 만들어 밀가루와 섞어 먹기도 했다. 예로부터 귀한 한약재로도 사용되었지만, 산촌에서는 식량자원으로 더 유용하게 쓰였다.
소나무 숲
보다 일상적인 식재료로는 산촌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산나물이 있었다. 봄철 새로 산나물이 돋아나기 시작하면 대부분의 여성이 산나물을 뜯으러 산으로 가곤 했다. 잔대, 청초, 댓잎나물, 다래와 같은 나물은 끓는 물에 데쳐 양념에 무치거나 초장에 찍어 먹었다. 다양한 종류의 나물을 한 데 삶아 무쳐야 맛이 더 좋았다고 전해진다. 반면 독특한 향이 있는 쑥이나 돗나물, 두릅 같은 나물은 따로 먹기도 했다. 산나물은 저장식으로도 유용했는데, 고깔추, 개미추, 밀기추, 고사리, 곰취, 미역취 등은 말려서 묵나물을 만들어 저장했다. 잎과 줄기가 드세지는 5~6월에 뜯어와 솥에 삶은 뒤 잘 말려 종류별로 저장해두면 먹을 것이 귀한 계절에 유용한 식량이 되었다.
소나무 숲의 특히 값진 보물로 송이를 빼놓을 수 없다. 소나무 아래에서만 자라는 버섯으로 인공적인 재배가 불가능해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작물이기도 하다. 1970년대까지는 식용 가능한 흔한 버섯의 일종이었지만, 일본 수출이 본격화되면서 가격이 올라가게 되었다. 특히 일본의 소나무숲이 벌채와 재선충으로 거의 사라지면서 일본 내 송이 생산량이 급락하면서 수출 요구량도 늘었다. 기존에는 송이 한 두름에 쌀 한되 정도로 거래되었지만 2017년에는 송이 1등급 1kg이 350,000원에 거래되기도 했다. 그만큼 산촌의 경제에 큰 도움을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공동체의 안녕과 전통 계승의 매개체

금강송은 건축재로서 궁궐과 사찰을 짓는 데 중요하게 사용되었던 나무다. 큼직한 금강소나무는 잘 썩지 않고 건조가 쉬우며 뒤틀림이 적어 관을 만드는 데에도 적합해 임금을 비롯한 왕족의 관을 만드는 데에 쓰이기도 했다. 울진에 남아있는 황장금표 역시 이를 나타내는 예시다.
왕조가 사라진 지금도 금강송은 소중한 자원으로 쓰이고 있다. 특히 궁궐을 복원할 때 국내산 금강송의 필요성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지난 2001년에는 문화재청의 요청으로 경복궁 태원전 복원사업에 수령 100년 이상의 울진 금강소나무 140그루를 공급하기도 했다. 금강소나무숲 4만 6,000ha를 문화재용 목재 생산림으로 지정하고 관리한 것도 안정적인 소나무 공급을 위한 것이다.
살아있는 금강송을 목재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산판작업이 필수적이었다. 주변 마을에서는 산판작업에 참가해 농가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안전에 유의하여 나무를 자른 뒤에는 굽은 부위를 피해 12자 길이로 자르되, 불가피한 경우에는 9자나 6자 길이로 자르는 벌목 과정을 거쳤다. 이렇게 일정한 길이로 자른 나무는 산 밑으로 옮겼다. 경사가 완만한 지형에서는 원목을 직접 굴려 산 밑으로 이동시키고, 급경사나 낭떠러지가 있는 곳에서는 통이라고 하는 유도로를 설치하는 식이었다. 이 유도로를 놓는 통 놓기 작업은 4~5명이 조를 이루어 진행했다. 가장 경력이 많은 쓰루쟁이가 조장으로 전체 작업을 지휘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도비꾼이라 하여 통나무를 목적지까지 운반하는 식이었다. 이렇게 이동한 나무들은 껍질을 벗기고 길이가 같은 것끼리 한 데 쌓아 낙동강변으로 이동해 안동까지 수송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전해지는 민요도 있다. 운재소리라 하여 산판 노래, 혹은 산떨이 노래라고도 불리는 노동요다. 선창은 숙련자였던 쓰루쟁이가 불렀다. 원목의 이동 방향과 힘의 강약 조절을 지시하는 선창을 부르고 나면 도비꾼들은 후렴을 부르며 원목을 운반할 힘을 모았다.
소나무
한편 금강송은 노동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마을과 가정을 지켜주는 신앙의 대상이기도 했다. 울진에서는 마을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동제를 올렸다. 금강소나무가 많은 만큼 마을의 동제당이 금강소나무로 구성된 마을 숲에 위치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두천2리 안말래 마을이 대표적으로 금강소나무를 신위로 모신 대표적인 경우다. 동제는 1년에 두 번 진행되는데,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주관할 제관을 맡는다.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유지하고 상을 당한 집안의 상주도 보지 않는 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제관의 집에서 제수를 함께 마련해야 했는데, 이때는 가까운 장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사되 값을 깎지 않고 재료를 사들인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정성으로 준비한 제수를 성황당에 진설하고 산신과 성황신, 목신과 잡귀잡신까지 대접한 뒤 음복이 시작된다. 이 동제의 내용을 기록으로 남기고 동제를 지내는 데 사용한 제비도 함께 결산했다.
각 가정에서 소나무를 모시는 행사는 산멕이기라고 불린다. 특정한 산에 각 가정에서 위하는 나무를 정해두고, 초파일 새벽마다 산에 올라 집안의 나무 앞에서 채소와 식혜, 돌돌개비떡 등을 제물로 올렸다. 소지를 태우며 가족의 건강과 가축의 번성을 빈 뒤에는 깨끗한 한지를 네 번 정도 접어 실타래로 소나무 등걸에 실타래로 묶어 병치레 없이 자식들이 건강하기를 빌었다. 새로운 한지를 묶기 전에는 작년에 소나무에 매었던 한지를 벗겨내었고, 떡을 산 여기저기 뿌리며 고수레를 하기도 했다.
이처럼 울진에서 소나무는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삶의 터전이자 지역의 문화를 투사하는 존재이기도 했고, 가족들의 안위를 비는 마음의 지주 역할도 해온 것이다. 솔잎혹파리나 소나무 재선충 등의 병충해로 인해 소나무의 생육이 어려워진 만큼 금강송에 들이는 노력도 한층 더 커지고 있다. 꾸준하게 한결같은 한국인의 전통적인 생활상을 금강송이 대변하는 데는 이런 묵묵한 실천이 저변에 깔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