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과 보리,
더 친숙하고 더 맛있게

글 ㅣ 김주희자료 ㅣ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
밀과 보리는 가을에 수확한 쌀이 다 떨어진 뒤에도 사람들의 배고픔을 책임지는 든든한 친구였다.
덜 여문 밀알을 한참 씹어 만들었던 밀껌이나 쪄서 말린 풋보리로 구황식품을 만들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배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닌 맛있고 몸에 좋은 음식을 찾는 시대이다.
높아진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밀과 보리는 다양한 품종이 개발 중이다.

남쪽은 보리,
북쪽은 밀이라

보리는 추운 날씨에 냉해를 입기 쉬운 품종이 많다. 그러나 밀은 지력을 많이 소모하는 대신 춥고 건조한 기후에서도 잘 자라는 경우가 많아 전통적으로 북쪽에서 많이 심는 작물이었다. 중국 양쯔강 이남에서는 벼농사가 주를 이뤘으나 이북에서는 밀농사를 많이 했던 것도 이러한 작물의 특성을 보여주는 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밀이 발견된 유적지가 평안남도 대동군 미림지인 것도 밀이 잘 자라는 기후와 연결되는 점이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까지도 밀은 그리 흔한 식재료는 아니었다. 「고려도경」에는 ‘밀이 적어 화북지방에서 수입하고 밀가루 값이 매우 비싸 잔치 때 먹는다’라고 적혔다. 조선시대에도 밀은 쌀보다 귀한 재료였다. 요새는 대표적인 서민음식으로 자리 잡은 칼국수나 수제비 등이 당시에는 양반가의 손님상에 올라갈만한 격 있는 요리였다. 당시 밀가루는 부르는 참 진()자를 써서 진가루, 진말이라 불렸으나 메밀은 목말(木末)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것만 봐도 밀가루가 당시에 얼마나 귀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반면 일제강점기 시기에는 밀 수확량이 적지 않았다. 조선총독부농사시험장에 따르면 1933년 당시 우리나라의 밀 수확량은 180만여 석, 약 28만 8,000톤에 달하는 양이었다. 현재 우리나라 밀 생산량인 1만 2,000톤에 비할 수 없을 정도의 양이다. 특히 우리나라 서부, 황해도, 평안남도, 경기도 지역이 밀 재배에 적합한 지역으로 손꼽혔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식량의 중요성을 자각한 조선총독부가 1923년 이후 밀 농사를 꾸준히 권장한 것의 연장선상이라 볼 수 있다.
밀 이미지
밀 이미지

분식의 대중화,
그러나 우리 밀 재배는 줄어들어

국수와 수제비, 떡볶이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음식들의 현대적인 모습은 1950년대 중반 이후에 나타났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밀가루 무상원조와 정부의 분식장려운동이 합쳐져 밀가루 음식이 보편적으로 퍼지는 양상이 나타난 것이다. 설렁탕을 시켰을 때 국수가 같이 말아져 나오는 것도 분식을 장려했던 1970년대의 흔적이다. 그러나 우리밀 재배는 크게 줄어들었다. 이미 미국에서 무상으로 받은 밀가루나 저렴한 수입 밀의 물량이 넘칠 정도였던 반면에 소규모 이모작을 통해 재배되던 우리 밀은 가격 경쟁력이 매우 떨어졌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는 우리나라의 토종 품종인 앉은뱅이 밀이 녹색혁명에 일조를 하게 되는 사건도 일어났다. 일본으로 유출되었던 앉은뱅이 밀이 다른 밀과 교배된 끝에 멕시코에서 거센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아 수확량을 보전할 수 있는 소노라 품종이 개발된 것이다. 이를 개발한 미국 아이오와 주 출신의 블러그 박사는 신품종 밀로 1960년대 인도와 파키스탄을 기아에서 구출하는 녹색혁명을 불러왔다는 공적으로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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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밀 수입 자유화, 1984년 정부 밀 수매제도 폐지 등이 진행되면서 국산 밀 농가는 거의 고사 상태에 이르렀다. 1991년 농민과 소비자 주도의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이 시작되었지만 수확량이 늘어나는 데 반해 소비가 제대로 활성화되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 현재는 농협이 우리 밀 사업을 주도하고 있지만 여전히 자급률은 1.2% 정도이다. 우리 밀의 생산 규모가 영세하고 파종시기, 사용하는 비료가 저마다 다르다 보니 수확된 밀의 품질도 들쭉날쭉해 용도별로 세분화하기가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가을밀 농사를 주로 짓는 우리나라 밀 농업 특성상 농약을 치지 않고도 건강한 식량을 얻을 수 있다는 장 점이 있어 우리 밀에 대한 관심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제거된 세계 최초의 밀 품종인 오프리와 같은 기능성 품종의 경우, 이미 해외에서 국제특허 출원이 완료되기도 했다. 또한 우리 밀로 만든 라면이 2018년에는 미국 LA로, 2019년에는 유럽 이탈리아로 첫 수출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첨가물을 최소화하고 건강하게 먹을 수 있으면서도 글루텐 성분이 적어 글루텐 알레르기가 있는 외국인들에게도 잘 맞는다는 것이 수출 경쟁력으로 뽑혔다.
고소

고소

국내 최초 과자용으로 개발된 밀 품종이다. 수확기에 계속 비를 맞으면 이삭의 낟알들이 수확기 이전에 발아하는 경우가 있는데 고소 품종은 이런 현상에 저항력이 강하다. 글루텐과 단백질 함량이 적기 때문에 과자를 만드는데 적합하다. 또한 10acre당 수확량이 561kg에 달하는데, 다른 밀에 비해 수확량이 많은 편이다.
백찰

백찰

2006년 신미찰과 금강을 인공 교배해 만든 품종이다. 비바람에 쉽게 쓰러지지 않지만 종자가 이삭에 붙은 채로 싹이 나는 현상에는 중간 정도의 저항력을 가지고 있다. 표면이 하얗고 찰기가 많아 쌀과 함께 밥을 지었을 때 부드럽게 씹히는 식감을 자랑한다. 도정을 적게 해도 색이 하얗기 때문에 다른 품종에 비해 식이섬유와 각종 미네랄 성분을 더 많이 섭취할 수 있다.
황금밀

황금밀

제빵용 밀가루를 국내 생산할 수 있도록 만든 신품종이다. 2020년 종자보급을 시작으로 2022년에는 농가에 시범보급을 할 예정이다. 종자가 이삭에 붙은 채로 싹이 나는 비율이 4.9%로 낮은 편이고 수확량도 많은 편이다. 단백질 함량이 14%로 다른 품종에 비해 높고 식빵을 만들었을 때 빵 부피도 크게 나와 제빵용으로 우수한 특성을 보였다. 현재 아이쿱생협에서 연 200톤의 황금밀 재배 계약을 맺었다.
새금강

새금강

건면용 밀 품종인 금강과 올그루를 2007년 인공 교배해 만든 품종이다. 추위에 잘 견디고 붉은곰팡이병과 종자가 이삭에 붙은 채로 싹이 나는 현상에 저항력이 강하다. 반죽이 부드럽고 쫄깃해 제면용으로 적합하며 밀가루 색이 밝아 국수로 만들었을 때도 고운 하얀색이 나온다. 단위 면적당 566kg이라는 우수한 수확 성적과 숙기가 빨라 이모작에 적합한 것도 장점이다.
오프리

오프리

세계 최초로 알레르기 유발물질이 제거된 밀 품종이다. 셀리악병의 원인인 저분자 글루테닌과 감마글리아딘, 알파 아밀라아제 인히비터,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물질 중 하나인 오메가-5 글리아딘이 없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특히 셀리악병은 서양인의 5%가 겪는 병인만큼 잠정 대상 수출국인 미국, 중국, 유럽에 국제특허 출원을 완료했다. 또한 단백질 비율이 14%를 넘어가 제빵용으로도 우수할 것으로 예측된다.
아리흑

아리흑

국내 최초로 개발된 ‘색깔 있는 밀’이다. 안토시아닌, 탄닌, 폴리페놀 성분이 일반 밀보다 많으며 항산화 기능도 10배가량 높다. 껍질에 기능성 성분이 많아 통밀로 이용할 때 식재료의 기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성숙기가 일반 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지만 비타민 B군, 아연, 나이아신 등의 미량원소가 일반 통밀가루에 비해 높아 고부가가치 원료 육성이 가능하다. 2017년부터 경남 밀양시와 협약을 맺어 생산단지를 조성했다.

우리 보리, 겨울에 키워
여름 별미가 되다

우리나라에서 보리를 키운 것은 선사시대까지 올라간다. 경기도 여주나 충청남도 보령 등 선사 유적의 집터에서 보리가 탄화된 상태로 발견된 것을 미루어 보면 기원전 10세기에도 보리를 재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이 건국을 위해 남쪽으로 내려올 때도 유화부인이 비둘기로 보리 종자를 보내줬다는 설화가 있을 정도이다. 식량작물로서 보리의 위상이 작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농사직설’, 조선 중기에 고상안이 지은 ‘농가월령’ 등에서도 보리는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가을에나 수확할 수 있는 쌀 대신 여름철의 식량원이 될 수 있었고 약재로서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7세기에는 보리의 품종 분화와 재배 방식에도 진전이 있었는데, 17세기 초에는 품종별 파종시기와 보리 종자의 저온처리 등이 ‘농가월령’에 기록되었다. 특히 보리 종자의 저온처리는 서구인들보다 약 240년가량 앞선 기록이다. 19세기에는 봄보리의 품종이 올보리, 검은보리 등으로 품종 분화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혼분식에서 벗어나
건강식의 자리를 노리다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보리는 가난한 옛날을 상징하는 작물로 평가 절하되기도 했다. 보릿고개라는 말이나 쌀의 생산량 부족으로 인한 혼분식 장려운동 등이 그 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혼분식 장려 운동의 일환으로 학생들의 도시락에는 보리와 같은 잡곡이 일정 분량 들어가야 했다. 1980년대부터는 쌀 자급이 가능해지면서 혼분식 장려운동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쌀밥에 대한 욕구가 높았던 만큼 보리는 상대적으로 인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면 맥주보리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1974년 맥주 원맥의 국산화 정책과 맥주소비 증가로 인해 1975년도부터 맥주보리가 활발하게 재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겨울철이 따듯하고 강수량의 연중 분포가 균일해야 한다는 재배 조건으로 인해 제주도, 전라남도, 경상남도의 남부 해안지역으로 재배 적응지역이 국한되어 있다.
보리 이미지
보리 이미지
건강식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보리도 밥으로만 해먹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가공해 먹으려는 시도가 늘어나고 있다. 식습관이 서구화되다 보니 당뇨, 비만, 지질대사 이상과 같은 병을 겪는 사람들이 늘어났는데 당지수가 낮고 대사증후군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보리가 이상적인 건강식품으로 다시 떠오른 것이다. 콜레스테롤 합성을 저해하는 토코트리에놀 성분, 혈중 지질 수치를 낮추고 혈당 조절에도 도움을 주는 베타글루칸 등이 그 주역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보리에 대한 세계적 인지도가 높지는 않다. 세계 최대의 보리수입국인 사우디아라비아는 대부분의 보리를 낙타나 양 등의 사료로 수입하고 있다. 2위 수입국인 중국도 맥주를 만들기 위해 수입을 하는 것이 대다수다. 그런 만큼 원물에 대한 거부감을 줄일 수 있도록 가공된 보리 상품을 만드는 것이 수출에는 보다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다. 그 예로 찰보리빵, 보리국수, 보리차, 보리커피 등이 있다.
한편 건강에 신경을 쓰는 웰빙트렌드를 통해 보리 수출 길을 트는 경우도 있다. 가공되어 바로 마실 수 있는 RTD(Ready To Drink) 보리차, 알록달록한 색상과 기능성을 겸비한 색깔보리쌀 등이 그 예다. 특히 RTD 보리차 시장 규모는 우리나라에서도 2019년 기준으로 500억 원대로 늘어났다. 집에서 끓여먹는 대신 간편하게 마실 수 있으면서도 국내산 보리를 사용한다는 점이 소비자들에게도 긍정적으로 다가온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건강음료에 관심이 높아지는 만큼 보리음료의 가능성도 적지 않다. 이미 미국으로 15만 병이 수출된 사례도 이를 뒷받침한다.
색깔보리쌀의 경우는 이미 미국과 중국, 베트남 등으로 수출이 되었는데, 이 색깔보리들이 치매와 노화예방에 효과가 있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3년만에 수출량이 40배 가까이 늘었다. 외국에서 볼 수 없는 색과 기능성을 지닌 것도 수출길을 든든하게 지켜줬다.
흑다향

흑다향

비바람에 잘 넘어지지 않고 알곡을 많이 맺는 검은보리이다. 2015년 보리차와 새싹보리용으로 개발되었다. 올보리 품종과 비교해 폴리페놀 함량이 높고 새싹보리로 취급할 때 사포나린, 폴리코사놀 등 기능성 성분 함량이 높게 나타났다. 2019년 보리차용으로 28톤이 보급되었고 새싹보리용으로 약 10톤이 공급되었다. 2020년에 70톤이 생산되어 공급될 예정이다.
흑보찰

흑보찰

2017년 개발된 검은 찰보리 품종이다. 밥으로도 지어먹을 수 있고 보리빵과 같은 가공식품에도 쓸 수 있다. 토양 곰팡이에 의해 바이러스를 옮기는 보리호위축병에 저항성이 있어 균질한 품질과 수확량을 유지할 수 있다. 국내 최초로 보리 낟알이 흑색인 종으로 안토시아닌과 폴리페놀이 풍부하다. 수량성은 새찰쌀보리의 95% 수준이지만, 수확량을 떨어트리는 보리호위축병에는 새찰쌀보리보다 저항력이 높다.
누리찰

누리찰

2015년 개발된 흰쌀찰보리 대체종으로 2019년부터 보급이 시작되었다. 보리호위축병과 성숙 후 쓰러짐에 강하다. 또한 키가 흰찰쌀보리에 비해 크기 때문에 기계로 수확하는 것이 쉽다. 밥으로 지을 때 물을 잘 흡수하고 낟알이 부드럽게 퍼지면서도 점도가 높아 씹는 식감이 좋다. 녹말의 노화도 느리게 진행되어 식감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다. 베타글루칸 함량은 6.8%로 일반 보리와 비슷한 수준이다.
광맥

광맥

추위를 잘 견디고 보리호위축병에 저항력이 높다. 비바람에 쓰러지는 현상에도 강해 기존 맥주보리 품종인 호품에 비해 같은 면적에서 더 많은 수확이 가능하다. 특히 정상적인 시기가 아닌 때에 이삭이 나오는 현상이 적어 생육이 안정적이다. 단백질 함량이 적어 맥주용 보리로 품질이 우수하다. 제주도를 포함해 1월 최저 평균기온이 -4℃ 이상인 남부 맥주보리 재배지역에 적합하다.
영양

영양

002년에 개발되어 2008년부터 보급된 사료용 청보리이다. 2008년 대한민국 우수품종상 경진대회에서 우수품종으로 선정되었다. 단위면적당 수량이 다른 품종에 비해 많이 난다. 습기로 인한 피해, 쓰러짐 현상에 저항력이 강하고 보리호위축병에도 강하다. 다만 까락이 다른 신품종보다 거칠기 때문에 가축의 선호도가 다소 떨어진다는 점이 약점이다.
유진

유진

보리는 기본적으로 까락이 가시처럼 돋아나 껄끄러운데, 이를 개선한 삼차망 청보리는 톱니가 날카롭지 않아 가축들의 기호도가 높다. 알곡과 잎, 줄기까지 급여할 수 있기 때문에 지방, 단백질, 전분, 섬유질이 많아야 하는 조사료의 조건에도 적합하다. 유진은 2016년 육성된 삼차망 청보리로 기존 삼차망 청보리에 비해 기계로 수확해도 알곡이 잘 붙어있는 내탈립성이 강하다는 장점이 있다.
연호

연호

우호보리와 영양보리를 함께 교배해 육성한 청보리이다. 줄기가 영양과 비교해 까락이 거의 없는 반매끈망 형태이기 때문에 그만큼 부드럽고 가축 기호성이 좋은 편이다. 다른 품종에 비해 추위를 견디는 힘이 좋고 잘 쓰러지지 않는다. 특히 젖산 함량이 높아 사료를 발효시키는 사일리지 형 조사료로 만들 때 품질이 좋게 나온다. 또한 건조시켰을 때도 다른 품종에 비해 많은 양이 나와 조사료로 적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