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을 묶어주는 나무
구례 산수유군락지

글 ㅣ 김희정자료 ㅣ 농촌진흥청
봄에는 노랗게, 가을에는 붉디 붉게 -
구례의 산수유나무가 자아내는 풍경은 마을의 역사와 함께 시간의 겹을 첩첩히 쌓아놓은 듯한 깊이가 있다.

약 천년 전 부터 마을에 심어졌던 산수유 시목, 길가에 심어진 산수유나무더라도 하나 하나 다 주인이 있는 채로 정성들여 가꿔진 모습들이 그렇다.
단순히 아름다운 가로수를 지닌 지역이 지닌 매력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구례의 정체성 중 일면을 보여주는 산수유나무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수유와 함께 자라고 마을을 가꿔온 사람들의 노력이 쌓여서일까,
구례의 산수유나무는 세 번째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전통과 문화를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다.

결혼 혼수로 들고 온 산수유나무

구례 산동의 산수유 유래에 대해서는 이런 말이 들려온다. 천년 전 중국 산동성의 처녀가 구례로 시집을 오게 되었는데, 고향을 잊지 않기 위해 산수유를 들고 와서 새로운 보금자리에 심었다는 전설이다. 지금도 이 나무는 천년을 살아남았는데, 구례 산수유의 시초가 된 이 나무를 산수유 시목으로 지정하고 각종 마을 제사의식도 이 곳에서 치르고 있노라고.
구례 산수유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 문헌에도 자주 나온다. 세종실록지리지, 산림경제, 동국여지승람, 승정원일기 등에는 구례에서 공납을 위해 산수유를 지역에서 재배했고, 한약재로도 쓰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본디 산수유 한 그루로 시작했던 마을 일대에서 척박한 산악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써 왔던 것이 조선시대에는 마을의 특산품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보편화되었던 것이다.
산수유나무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산수유마을도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주 소득작물로 산수유나무를 빈 집터나 휴경지를 이용해 확대 재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19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후반까지 산수유 묘목이 농가에 무상 보급된 것도 지금의 산수유마을의 경관을 만들어내는데 한몫했다. 산수유마을이 있는 산동면의 경지 면적이 전체 면적의 10%를 살짝 웃도는 상황에서, 벼농사보다 더 수익이 높은 산수유나무는 자녀들의 대학 등록금도 책임질 수 있는 믿음직한 ‘대학나무’였다. 이 산수유의 씨와 과육을 분리하는 작업은 마을의 어린이와 여인들이 모두 동원되어 품앗이로 진행되었다. 이때 작업을 얼마나 했는지 계량하기 위해 썼던 그릇의 크기는 집집마다 달랐는데 그릇으로 계량한 만큼 삯을 받아가곤 했다. 그런 만큼 ‘그릇 크기가 그 댁 안주인의 품성이다’라는 말이 전해져 오는 것도 향토적이고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산수유와 돌담의 관계, 돌담과 생태계의 관계

산수유는 뿌리가 넓게 퍼지지만, 깊게 파고 들어가는 편은 아니다. 강한 태풍이나 홍수에 나무가 흔들리면 그대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약점이 되기도 하는데, 이를 보완해주는 것이 산수유마을에 널리 퍼져있는 돌담이다. 돌이 차곡차곡 얹힌 돌담길이 구불거리며 물길처럼 퍼져있는데, 집 울타리는 조금 높게, 경작지의 경계 표시는 다소 낮게 쌓았다.
이 돌담이 눌러주는 무게가 산수유나무를 지탱해주면서 산수유가 오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데 일조한다. 또한 산수유는 배수가 잘 되면서도 보드라운 사질양토에서 생육이 활발한 편인데, 모래흙이 많이 섞여서 필요한 수분조차도 빠르게 배수가 되어버리는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 산수유 자체가 수분을 찾아서 깊게 뿌리를 내리는 수종이 아닌 만큼 비가 제대로 오지 않을 때면 수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보완해주는 것이 돌담이다. 땅을 무게감 있게 눌러주면서 물기의 증발을 막고 한층 생태적으로 다양한 환경을 이루게 도와주는 것이다.
산수유 군락지의 식물상 조사도 이를 뒷받침한다. 산수유 농업을 오래도록 유지했던 위안리와 대평리 사이, 원달리와 내산리 사이를 대상으로 식물상 조사를 진행했는데, 논과 밭, 산림 지역보다는 산림 지역과 가까우면서도 돌담과 경계를 형성한 군락지에서 다양한 식물이 자라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반면 산수유나무가 없지만 돌담으로 이어진 부분에서는 각종 덩굴성 식물이 관찰되면서 돌담이 없는 지역과 확연하게 다른 차이를 보였다.
산수유
산수유

마을사람들을 한데 묶어주는 산수유나무

산수유나무에서 열매를 수확해 시장에 내다팔기까지는 오랜 시간과 노동력이 필요하다. 열매를 딸 때는 열매가 얼어버리기 전에 짚으로 짠 덕석을 깔고 장대가 닿는 곳에는 나무를 털어 열매를 얻거나 망태를 지고 나무 위로 올라가 일일히 손으로 따야 했다. 나무를 털 경우에는 나뭇잎이나 다른 이물질도 같이 떨어지기 때문에 열매를 골라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후 햇빛에 잘 말리고 온 돌방에 마저 널어서 열매에 수분을 60% 이상 날린 뒤 과육만 남겨 다시 완전건조를 한 후에야 시장에 내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옛날에는 어린이와 아녀자들이 앞니로 산수유 과육만 까내서 그릇에 뱉는 식으로 품앗이를 했는데 이런 공동체 활동이 마을을 한층 모이게 해주는 역할로도 활용되었다. 산수유를 까면서 앞니가 많이 닳곤 해 산동 출신 처녀는 다른 지역에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는 말이 이러한 활동을 뒷받침해준다.
산수유나무와 새
현대에는 산수유 열매를 따고 건조하고 씨와 과육을 분리해주는 과정에 기계가 도입되었다. 예전처럼 전통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은 키나 풍고를 이용해 산수유 열매만 오롯하게 남겨놓는 열매 고르기 과정과 씨를 제거한 뒤 마저 과육을 완전 건조시키는 두 부분만 남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수유나무를 통해 마을 사람들을 단합시키는 모임이 있다. 상관마을과 우와마을에서 볼 수 있는 당산제가 그것이다. 마을의 수호신격인 당산나무에 마을 사람들의 무사한 생활과 풍요로움을 기원하는 당산제는 서로의 액운을 씻어주길 바라는 농촌공동체적인 면모를 부각시킨다. 산수유꽃축제 기간에 산수유 시목지인 계척마을에서 처음 심어진 산수유나무 앞에서 풍년제를 지내는 것도 마을의 전통과 공동체성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산수유나무, 대학나무에서 효자나무로

산수유 열매
산수유나무에서 딴 열매로 자녀들의 뒷바라지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마을 차원에서 꾸준히 보전해온 산수유 군락지는 이제 마을의 또 다른 효자노릇을 하고 있다. 매년 3월 말부터 4월까지 만개하는 산수유꽃과 어우러진 정경을 이용해 산수유꽃축제를 개최한다. 산수유꽃의 꽃말인 영원불멸의 사랑을 모티브 삼아 구례의 젊은이들이 산수유꽃과 겨울을 견뎌낸 붉은 열매를 연인에게 선물로 주던 풍습을 발전시킨 것이다. 가을철 붉은 산수유가 다닥다닥 붙어 있을 때에는 산수유열매축제를 개최한다. 이를 통해 산수유 열매를 직접 따보고 도시 사람들이 농촌의 전통적인 생활상을 체험해볼 수 있는 도농체험효과도 쏠쏠하다. 1박 2일 동안 민박이나 텐트를 빌려 깊어진 가을, 지리산과 산수유마을의 정경을 한껏 체험할 수 있는 터라 가족들과의 추억 만들기로도 좋다.
이전에는 이 마을에서 나는 산수유 열매를 대부분 한약재로 시장에 내보냈지만, 양질의 산수유를 이용한 마을의 특산품을 만들어보자는 의견이 모아지면서 자체 가공품도 만들어지고 있다. 차나 효소 등을 비롯해 지리산의 맑은 물과 산수유를 이용한 막걸리 등이 만들어지면서 농특산물 판매도 한층 활기를 띄고 있다. 산수유로 인해 동네에 활기가 돌면서 효자나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 시작한 이유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구례 산수유꽃축제도 취소되었다. 그러나 산수유꽃의 개화는 인간의 사정으로 미뤄지지 않은 채 눈부시게 꽃을 피웠다. 마을 사람들의 평화와 안녕을 비는 당산제가 산수유 꽃그늘 아래 정겨운 마을을 오롯하게 지켜주길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