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의
농업경제사상

「과농소초(課農小抄)」를 중심으로

글 ㅣ 경기사학회 최홍규 회장
(전 경기대 사학과 교수)
현재와 미래를 예측·대비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보라는 이야기가 있다.
현재 농업은 꾸준한 발전을 이루고 있지만, 여전히 다양한 문제들이 곳곳에 산재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연암 박지원의 저서 「과농소초(課農小抄)」에 담긴 농업경제사상을 살펴보고
앞으로 우리 농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고민해 보자.

농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연암 박지원

연암 박지원
연암 박지원
농서 「과농소초」는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0.20~1805.2.22)의 농업경제사상을 대변해 주는 주요 저작의 하나이다. 그는 사상 성향 면에서 서울의 도시적 환경을 배경으로 상공업 중심의 이용후생계(利用厚生系) 북학파(北學派)의 영수로서 경기도 안산의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경세치용계(經世致用系)의 중농학파와는 구별되는 특색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조선후기 사회는 여전히 국가의 재정과 산업면에서 농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만큼 연암 또한 이 문제를 현안 과제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열하일기(熱河日記)」, 「연암집(燕巖集)」 문집에 나타난 우국제민(憂國濟民)의 실학사상 가운데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의 하나가 바로 「과농소초」,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로 대표되는 농학사상과 토지제도론이라고 할 수 있다.
박지원은 18~30세 사이에 앞에서 예거한 한문소설을 지어 문명을 높였고, 「양반전」, 「호질」과 같은 작품을 통해 당시 첨예화되던 양반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비판적인 시각에서 신랄하게 풍자하였다. 그러나 41세가 되던 1774년(정조 1년) 권신(權臣) 홍국영(洪國榮)이 세도를 업고 전권을 휘두르게 되자 곧 가족을 이끌고 황해도 연암협으로 옮겨 은거하면서 이때부터 자호를 ‘연암’으로 쓰게 되었다.
금천시대에 연암은 양잠을 위한 뽕()·밤()·배()·복숭아()·감()나무 등의 재배와 종어(種魚), 양봉(養蜂), 목우(牧牛), 적마(績麻), 착유(搾油) 등에 힘쓰는 한편, 황무지의 개간, 노농(老農)의 농사 경험을 참고로 농서를 연구하는 등 이론과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학문적으로 농학(農學)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물론 그는 금천(金川) 이거 이전에 당대 조야(朝野)의 관심사였던 농학의 발전과 귀농에 대비하여 중국과 한국의 농서를 읽고 농사지식과 그 문제점을 검토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시기 그는 농서에서 얻은 정보와 지혜를 이 고장 농부들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예컨대 옛 농서에 기록된 조과(趙過), 가사협(賈思協), 왕정(王禎) 등의 옛 농법을 설명한 것들이 그 예이다. 중국의 옛 농서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그의 농학연구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고,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대 농서는 물론 이 문제와 관련된 다양한 독서와 견문, 경험을 통하여 농학에 대한 보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식견을 갖게 되었다.

「과농소초」로 개혁 가능한
농업경제사상 주장

과농소초
과농소초(課農小抄)
「과농소초」와 그 말미에 덧붙인 「한민명전의」는 연암의 나이 63세가 되던 1799년(정조 23년)에 집필한 저술이다. 연암은 「과농소초」를 찬술함에 있어서 우리나라와 중국의 농서를 면밀히 비교 검토하고 개혁 가능한 농업경제사상을 견지하려고 하였다. 「과농소초」와 「한민명전의」에 나타난 연암의 농학과 토지제도의 개혁을 골자로 하는 그의 농업경제사상과 그 저술의 집필의도, 입장, 배경 등을 몇 가지로 요약해서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연암은 이용후생 이후에야 정덕(正德)을 이룬다는 입장에서 생업과 경제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그 실현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과학기술의 발전을 주장했다. 즉, 그는 “이용이 있은 다음에야 후생, 즉 경제생활을 풍부하게 할 수 있고, 경제생활을 풍부하게 한 다음에라야 도덕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당시 주자학적인 명분론과 형식논리에 사로잡혀 이용후생의 측면을 도외시하는 비실용과 명분론적인 태도와 현실을 통렬히 비판했다. 농학 또한 어디까지나 상()·공()의 학과 함께 실학임을 밝혔다.
둘째, 연암은 농·상·공에 대한 학문, 곧 실학을 발전시킬 담당의 주체를 사대부로 보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4민 중 ‘사()계급’은 농·상·공 등 서민계층의 생활 영위에 이바지하는 데 그 사명이 있음을 강조했다.
셋째, 연암은 기왕의 우리나라 농서가 지닌 결함을 보충하고 새로운 농법을 모색 발전시킨다는 데 그 서술 목표를 두었다. 이러한 전제하에 영농방법의 혁신을 위해서는 농지제도의 개량, 노동력 절감, 농기구 개량과 분양법(糞壤法)의 개선, 관개 수리시설의 개선 등이 뒤따라야 할 것을 주장했다.
넷째, 영농의 합리화를 위해 노동력 절감 문제와 관련하여 효율적인 농기구의 개량을 제안했다. 연암은 「과농소초」에서 농기구 개선에 유념하여 당시 농촌의 타곡장(打穀場)에서 관용되고 있는 키()나 소석(小席) 등이 비능률적임을 지적하고 중국의 양선(颺扇)으로 대체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다섯째, 연암은 농작물 소출의 다과(多寡)는 시비(施肥, 거름주기)의 적절한 투여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견지에서, 취분(取糞, 거름 장만)과 시비 등 토양법의 일대 개선을 제언했다. 그는 거름을 저장할 시설물 설치와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논의한 것처럼 중국인들의 분양법(糞壤法)을 배울 것을 말하였다.
여섯째, 관개(灌漑) 수리시설의 중요성에 유념하여 용수(用水)와 배수(排水)시설로서 수리를 갖출 수 있다면 한전(旱田, 밭)과 수전(水田, 논)에 있어서 소출을 늘릴 수 있다고 보았으며, 수차(水車)를 제조·활용한다면 한재(旱災, 가뭄)도 두려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연암은 「과농소초」에서 우리나라 농서로서는 최초로 수리조(水利條)를 마련하는 선진성을 보였다. 그는 중국 서광계의 「농정전서」로부터 산향수리법(山鄕水利法), 한전용수법(旱田用水法), 간천법(看泉法) 등 28종의 수리법을 소개하면서 그 보급·활용을 제의했다.
연암은 이 「과농소초」를 통해 농업부문에서 생산력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생산도구인 농기구의 개선, 영농법의 개량, 새로운 농사시설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절기에 따른 전답(田畓)의 구획법, 농기구 개량, 토지의 경작과 개간, 수리사업과 시설, 토양, 거름, 곡물 품종, 파종, 제초, 수확 등과 해충 구제, 곡물 저장 등 다방면에 걸쳐 구체적인 개선책을 제시했다. 특히 한국 농서로는 최초로 ‘수리조’마련, 관개수리사업의 중요성 강조, 저수지를 구축하고 수차(水車) 등의 수리시설을 광범위하게 제작 사용할 것과 수레의 도입이 급선무라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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