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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은 추운 겨울을 견디며 단단하게 자란다.
연구자의 시간도 기록과 기다림 속에서 조금씩 깊어진다.
오늘 심은 한 알의 밀이 미래의 들판을 준비하듯, 김유림 농업연구사도 우리밀과 함께 내일의 연구를 키워가고 있다.
벼 수확이 끝난 10월, 들판이 잠시 숨을 고를 때 또 다른 농사가 시작된다. 땅을 갈고 씨앗을 뿌려 겨울을 날 밀을 준비하는 일이다. 국립식량과학원 맥류작물과 김유림 농업연구사에게 가을은 우리밀 연구의 출발점이다.
김 연구사는 논에서 우리밀을 안정적으로 재배할 수 있는 기술을 연구한다. 우리밀은 오랫동안 우리 식탁을 지켜왔지만, 1960~70년대 값싼 수입밀이 들어오면서 재배 면적이 크게 줄었다. 이후 1980년대 우리밀살리기 운동을 계기로 생산과 연구가 다시 활기를 찾았다.
“우리밀 재배는 밭 중심에서 논 이모작 중심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새로운 품종이 계속 개발되고 기후도 빠르게 변하고 있죠. 논에 적합한 재배 기술과 품종별 재배법,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안정적인 생산 기술을 마련해야 합니다.”
연구 5년 차인 김 연구사는 우리밀과 함께 성장하고 있다. 우리밀이 새로운 재배 기준을 찾아가는 동안, 그 역시 연구자로서 자신만의 논밭을 차근차근 일구고 있다.
남편 최명구 농업연구사도 같은 기관에서 밀을 연구한다. 김 연구사가 밀을 잘 키우는 재배 기술을 연구한다면, 남편은 더 좋은 품종을 만드는 일을 맡고 있다.
밀농사는 단순해 보인다. 가을에 씨를 뿌리고 겨울을 난 뒤, 봄부터 생육과 병해를 관리해 초여름에 수확한다. 하지만 언제 씨를 뿌리고 비료를 얼마나 주느냐에 따라 수량과 품질은 크게 달라진다. 김 연구사는 이런 작은 차이를 찾아내는 일을 한다.
첫 연구부터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발령 후 맡은 파종 시기 시험에서 늦게 심은 밀이 고르게 싹을 틔웠지만, 이틀 뒤 시험구가 텅 비어버린 것이다. 먹이가 부족했던 까마귀들이 어린 싹에 붙은 종자를 모두 쪼아 먹었다.
“싹이 잘 올라왔다고 좋아했는데 하루아침에 모두 사라졌어요. 정말 허탈했죠.”
늦게 파종한 밀이 겨울철 새들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책만으로 알기 어려운 현장의 변수였다. 이후 새망을 설치하는 일도 시험 과정에 포함됐다.
그날 심은 씨앗은 사라졌지만 연구까지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논문에 담기지 않는 현장의 변수를 발견하고 대비하는 일 역시 연구의 중요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다음 해에도 김 연구사는 다시 땅을 갈고 씨앗을 뿌렸다. 원하는 결과를 확신할 수 없어도 같은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 연구자의 일이다.
그 무렵 국립농업도서관에서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을 만났다. 책의 주인공 엘제아르 부피에는 황폐한 땅에 홀로 도토리를 심는다. 누가 시킨 것도, 보상을 바란 것도 아니다. 그는 날마다 좋은 도토리를 고르고 묵묵히 땅에 심는다.
도토리는 나무가 되고, 나무는 숲을 이룬다. 숲이 자라자 물길이 살아나고 사람들도 다시 마을로 돌아온다.

부피에는 자신이 심은 도토리가 거대한 숲이 되는 날을 볼 수 있을지 알지 못했지만 결과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오늘 해야 할 일을 해냈다.
김 연구사는 그의 모습에서 자신의 연구를 떠올렸다.
“연구도 원하는 결과가 나올지 확신하고 시작하는 일은 아니잖아요. 그래도 지금 해야 할 일을 꾸준히 해나가는 거죠.”
김 연구사도 먼 미래의 성과를 앞당겨 말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밀이 어떤 환경에서 더 안정적으로 자라는지 관찰하고 기록한다. 그 기록이 언젠가 농업 현장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오늘도 한 알의 밀을 심는다.
묵묵히 쌓아온 성실함은 값진 성과로 돌아왔다. 김유림 연구사는 ‘국내 기후변화에 따른 밀 농업형질 변화 분석’ 연구로 과학기술 우수논문상을 수상했다. 최근 10년간 전국 6개 지역에서 같은 방식으로 밀을 재배하고, 생육을 조사하며 축적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기후변화가 우리밀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연구였다.
그는 이 연구를 통해 겨울철 기온 상승으로 밀의 출수기가 앞당겨지고, 어린 이삭이 예상보다 이른 시기에 저온에 노출될 위험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는 단순히 기후변화의 현상을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앞으로의 파종 시기와 비료 관리, 품종 육성 방향까지 함께 고민하게 하는 의미 있는 연구였다.
김 연구사가 꿈꾸는 미래는 분명하다. 기후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 재배 기반을 만들고, 국산 밀의 안정적인 생산과 자급률 향상에 기여하는 것이다. 연구자와 농업인이 함께 성장하는 지속 가능한 우리밀 산업도 그가 그리고 있는 미래다.
“큰 목표를 이루려면 지금 제 자리에서 맡은 연구를 꾸준히 이어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도토리 한 알이 모여 숲을 이루듯, 오늘 심은 밀 한 알도 언젠가 넓은 들판을 황금빛으로 물들일 것이다. 김유림 연구사는 그날을 준비하며 오늘도 자신의 자리에서 씨앗을 심고 기록을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