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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걷고, 잘 먹고, 잘 쓰는 일. 오은 시인에게 이 세 가지는 결국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과 닿아 있다.
일상의 작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문장으로 길어 올리는 그를 만나, 나를 돌보고 삶을 바라보는 이야기를 나눴다.
길을 걷다 보면 어디로 이어질지 모르는 길을 만나기도 한다. 백지 앞에 선 오은 시인은 길을 잃고 헤매거나 벽을 만나 돌아서기도 하며 자신만의 길을 찾아간다. 일상을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새로운 ‘나’를 만나는 과정이다. 그렇게 바라본 세상은 문장이 되고 마침내 한 편의 시가 된다.
안녕하세요,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사람 오은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글을 썼어요. 나를, 내 생각을, 내 감정을 단어나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어 행복했죠. 시는 재수할 때 쓰기 시작했어요. 다니던 독서실이 너무 조용해서 갑갑함을 느꼈거든요. 그 갑갑함의 근원을 파헤쳐 보고자 노트에 쓰기 시작한 게 시가 되었습니다.
내가 뻗어나갈 수 있는 최대치 같아요. 백지 앞에서는 늘 막막하지만, 그 안에서 뭐든 될 수 있고 어디로든 갈 수 있으니까요. 혼자서만 할 수 있기에 벽을 만나고 넘는 것도, 길을 잃고 헤매다 다시 돌아오는 것도 저지요. 백지 앞에서는 으레 모험을 떠나는 마음이 됩니다.
돌아보니 다양한 생각과 방식을 체득하는 시간이었어요. 우물에 갇히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는 시간이었달까요. 사회학을 공부하며 ‘왜’라는 질문을 뾰족하게 벼릴 수 있었고, 문화기술을 공부하면서 기술의 중심에 인간이 있음을 재확인했어요. IT 기업에서 일하며 시를 쓰기 위해 일상적으로 하던 관찰을 소셜 미디어상에서 하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빅데이터를 분석해 유의미한 결과를 찾는 일도 일종의 ‘관찰’이거든요. 제대로 ‘보는’ 일에서 변화가 시작될 수 있음을 깨달은 시간이었어요.
시는 굉장히 천천히 스며드는 장르예요. 같은 시를 이틀 연속 읽으면 어제 좋았던 문장과 오늘 마음을 흔든 문장이 다를 거예요. 그사이에 내 상태가 달라졌기 때문이죠. 모든 것이 급변하는 시대에 잠시 멈춰 서서 나를 돌아보게 하는 게 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요리를 합니다. 요리는 완성이 되니까요! 몇 시간 동안 앉아 있어도 글 한 줄 못 쓸 때가 있고, 썼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존감이 낮아져요. 그럴 때 간단한 밑반찬이라도 만들면 오늘 뭐라도 한 것 같더라고요. 이걸 먹고 내일은 잘 써보자고 마음을 다독이지요.
같은 요리도 할 때마다 맛이 조금씩 다르잖아요. 글쓰기도 마찬가지예요. 같은 소재로 써도 예전에 썼던 글과 똑같이 쓰긴 불가능해요. 그사이에 저의 생각도, 감정도 달라졌으니까요. 익숙하다고 대충 하다간 망쳐버리기 십상인 것도 비슷해요. 쉽다고 여길 때, 잘한다는 오만에 빠질 때 큰 실수를 저지르곤 하잖아요.
「내일의 요리」(『유에서 유』, 문학과지성사, 2016)라는 제목의 시를 쓴 적이 있어요. 시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어제는 쌀을 씻었습니다/ 신경을 쓰고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하나의 명사를 위해/ 너무 많은 동사들을 소모했습니다”. 요리라는 명사, 시라는 명사를 위해 많은 동사가 필요하잖아요. 요리에는 썰다, 깎다, 끓이다, 무치다, 부치다 등의 동사가 필요하고, 시 쓰기에는 떠올리다, 적다, 고치다, 다듬다, 찍다 같은 동사가 필요하지요. 우리가 일상에서 해내는 많은 일이 실은 신경을 쓰고 주의를 기울이는 일이로구나 생각했어요.
김치를 좋아합니다. 배추김치, 총각김치, 동치미, 파김치 등 온갖 종류의 김치를 다 좋아해요. 고향이 전북 정읍인데, 전라도 김치에는 젓갈이 많이 들어가요. 서울은 새우젓과 멸치액젓만 쓰는데, 전라도는 황석어젓갈을 사용해요. 황석어 살점이 거의 남지 않도록 달여 넣지요. 김장 직후에도 맛있지만, 익으면 젓갈의 진가가 드러나 감칠맛이 극대화돼요. 젓갈을 좋아하게 된 것도 전라도에서 살아서고, 서울에서 살았다면 젓갈의 매력을 모르고 자랐을 것 같아요. 입맛도 취향이라면, 취향이 만들어지는 데 자라온 땅이 무척 중요하다고 봅니다.
도심이든 자연이든 길이 있으면 걸어요.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여기 꽃밭’이라는 팻말이 있는 공간을 발견했어요. 꽃 한 송이 없이 잡초만 자라고 있던 곳이었죠. 갸웃거리며 더 걷다 보니 알겠더라고요. 사람들이 양심상 꽃밭에는 쓰레기를 버리지 못해 그곳만 쓰레기 없이 깨끗했단 걸요. 꽃밭에는 꽃이 없어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날이었죠. 걷다 보면 몰랐던 사물을 발견하거나 무언가 알게 되고, 그게 시의 재료가 되기도 해요.
도시 보도블록 길과 달리, 농촌 시골길은 사람이 걸어 다니면서 내는 길이에요. 사람이 많이 다녀서 좀 패어 있기도 하고, 울퉁불퉁하기도 한 길의 흔적이 좋아요. 그런 길을 걸으면 마치 그곳 동네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김숨의 『딸기 이론』(민음사, 2026)을 추천합니다. 딸기를 수확하는 여성 이주노동자에 관한 소설이에요. 우리가 집에서 편하게 먹는 농작물들이 어떤 ‘손’들을 거치는지 곰곰이 떠올리게 하는 묵직한 작품입니다. 우리 입에 들어가는 것에 당연한 건 없다는 생각에 다다르면 겸허해져요.
꾸준히 쓰고 싶어요. 계속해서 ‘나’를 적극적으로 만나고 싶습니다. 시를 쓸 때 가장 자유로우니까요. 이 자유로움을 오래도록 만끽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