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 향으로 한 철을 흔들다.’ 한국인의 일상 속 복숭아 감각을 헤아리다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한마디다. 그러고 보니 복숭아는 꽃부터 다르다. 여느 유실수 감각과는 다르다. 복숭아꽃, 복사꽃이라는 말 자체가 한국인의 일상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복사꽃은 봄부터 한반도 남쪽을 희게, 붉게, 연분홍과 짙은 분홍으로 다채롭게 물들이며 서서히 북상한다. 이윽고 늦봄부터는 눈에 띄는 빛깔과 조형미를 뽐내며 열매가 맺히고, 매력적인 향을 예비한다.
한눈에 들어오는 색채와 조형미, 풍미와 맛까지, 보면 볼수록 매력적인 존재가 복숭아다. 이윽고 농익은 열매를 덥석 단숨에 베어 물면, 과육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입속에서는 복숭아 향이 터진다.
아득한 예부터 한반도 사람들은 복숭아를 먹었다. 충청북도 충주 조동리 유적, 충청남도 태안 고남리 패총, 충남 논산 원북리 유적 등에서 선사시대 사람들이 남긴 복숭아 씨앗이 무더기로 확인된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같은 문헌에도 복숭아와 복숭아꽃 관련 기록이 흔히 보인다. 771년 신라 혜공왕 7년에 완성된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에 새긴 문장을 보자. 그때 신라 사람들은 내 나라의 지리를 이렇게 요약했다.
“동해 바닷가, 여러 신선이 조용히 사는 곳. 땅은 복사골에 자리하고 경계는 해 뜨는 곳에 닿았어라. 여기 우리나라가 있고 (정치적으로) 통합되어 한 고장을 이루었네(東海之上, 衆仙所藏. 地居桃壑, 界接扶桑. 爰有我國, 合爲一鄕).”
‘복사골(桃壑, 복숭아 골짜기)’을 두고 역사학·문학·문헌정보학·정치외교학·민속학 저마다가 다른 해석을 붙일 만하다. 복사골에서 도화동(桃花洞)에 이르는 땅 이름의 오랜 연혁을 짐작할 수 있다.
봄부터 설레게 하더니 막 한 알이라도 보이면 기분 좋아지는 사물이 복숭아였다. 기울어가는 고려를 일으켜 세워보겠다고 동분서주했고, 조선 태조 이성계로부터 내게 오라는 유혹을 받았으나 끝내 새 정권과 손잡지 않은 강직한 사람 이색(李穡, 1328~1396)도 복숭아를 좋아했다. 이색은 복숭아를 보고 이렇게 읊었다.
“작은 복숭아 막 익어 푸르스름 동글동글한데(小桃初熟碧團團)/투명한 과육 살살 씹으니, 이도 볼도 시려(細嚼氷肌齒頰寒).”1)
이만한 유실수에 이만한 과실이니 복숭아를 싣지 않은 농업서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5세기 전순의(全循義)가 쓴 『산가요록(山家要錄)』에는 배나무·감나무·능금나무·밤나무·대추나무·앵두나무·포도나무·자두나무·매화나무·살구나무·석류나무·모과나무·은행나무·등자나무·귤나무와 함께 복숭아나무가 다뤄졌다. 이들 유실수는 거름을 잘해 관리해야 할 중요한 작물이었다.
생과를 맛있게 먹는 것은 물론이고, 철을 넘겨 두고두고 먹을 궁리도 일찍부터 했다. 『산가요록』에는 생과일을 ‘가을이 깊어지면 뽕나무 재(桑灰)를 항아리에 담고, 과일의 꼭지를 따지 않고 묻고, 진흙을 발라 입구를 단단히 봉해’ 보관하면 ‘이듬해 4~5월이 되어도’ 무르지 않는다고 적혀 있다.
복숭아가 한창일 때는 ‘침채(沈菜)’로 담갔다. 침채는 채소나 과채, 과실을 절여 국물이 넉넉히 나오도록 해 먹는 음식이다. 그 가운데 짜게 절인 침채는 물김치의 선배다. 『산가요록』에 따르면 복숭아는 순무·무·토란대·동아·배추·파·송이·생강·마늘·수박·푸른콩(靑太)·살구와 더불어 침채로 담글 만했다. 이렇게 담근 복숭아 침채를 ‘침도(沈桃)’라 했다. 침도는 반쯤 익은 복숭아 과육과 꿀을 1 대 4 비율로 담근다. 또는 복숭아를 볕에 말리고 소금물에 짜게 절여 항아리에서 익힌 뒤, 음력 10월 초에 묵은 물을 버리고 새 물로 갈아 쓴다.
복숭아는 일찍이 품종과 주요 산지가 기록된 작물이다.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 허균(許筠, 1569~1618)의 『도문대작(屠門大嚼)』에 따르면 ‘황도(黃桃)’는 오늘날의 강원도 춘천과 홍천에서 많이 났고, ‘반도(盤桃)’는 오늘날의 경기도 시흥 일대와 과천에서 많이 났다. 허균은 경기도 안양 시냇가에서 난 반도를 얼마든지 맛볼 수 있었다. 친척이 따 보내준 덕분이다.
하지만 『도문대작』을 쓸 무렵, 임진왜란을 지나면서 그 명맥이 끊겼다. 이에 허균은 ‘지금은 얻을 수 없으니 안타깝다(惜今不可得也)’고 하면서 속상해했다. 20세기 초부터 1970년대까지 경기도 부천시 소사 일대는 일본에서 온 신품종 복숭아 원예로 흥성했다. 이 일대의 토질과 기후가 복숭아 농사에 적합했다.
한편 『도문대작』에는 전주 부근 어디서나 크고 단 ‘승도(僧桃)’가 난다는 기록도 있다. 승도는 스님 머리통 같은 복숭아란 뜻이다. 웃으면서 상상하시라. 복숭아는 표면이 솜털로 덮인 유모종(有毛種)과 솜털이 없는 무모종(無毛種)으로 나뉜다. 오늘날 한국인은 유모종을 일반적으로 ‘복숭아’라 일컫고, 무모종을 ‘천도(天桃)’라 한다. 이렇듯 유모종과 무모종도 일찍이 기록되었다.
18세기 문헌인 홍만선(洪萬選 1643~1715)의 『산림경제(山林經濟)』에는 복숭아 기록도 풍성하다. 홍만선은 동아시아의 고전을 인용해 매화나무, 살구나무와 더불어 복숭아나무를 경제성 높은 산림자원으로 기록했다. 이채로운 음식으로는 동아시아의 공통 조리법으로서 복숭아정과를 기록했다. 만드는 법은 이렇다. 씨 바른 복숭아 과육을 저며 꿀에 졸인다. 이것을 한 번 더 꿀에 졸인 후, 건지고 말려서 찬 데 보관했다고 썼다. 이는 복숭아 병조림, 통조림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복숭아와 단맛 나는 조미료의 만남은 이렇게 오래되었다.
『산림경제』의 뒤를 이은 유중림(柳重臨, 1705~1771)의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는 유월도(六月桃)·승도(僧桃)·번도(蹯桃)·감인도(甘仁桃), 꽃이 자주색이고 열매가 매우 큰 이름 없는 종 등이 기록됐다. 관련 지식은 서호수(徐浩修, 1736∼1799)의 『해동농서(海東農書)』로 이어진다. 서호수는 유모종을 모도(毛桃), 무모종을 승도(僧桃)로 구별했다. 서호수에 따르면 유월도(六月桃)는 조생종, 울릉도(鬱陵桃)는 울릉도(鬱陵島) 특산종, 감인도(甘仁桃)는 신라 유래 품종, 편도(扁桃)는 페르시아 유래 품종이다. 홍도(紅桃)·벽도(碧桃)·삼색도(三色桃)는 각각 꽃 색깔에 따른 분류다. 예부터 지역, 출하 시기, 품종 유래, 꽃 빛깔까지 기록할 만한 작물이 복숭아였다.
이상의 정보는 서호수의 아들 서유구(徐有榘, 1764~1845)가 쓴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로 이어진다. 음식과 조리에 관한 서술은 서호수의 며느리이자 서유구의 형수인 빙허각 이씨(憑虛閣李氏, 1759~1824)가 쓴 『규합총서(閨閤叢書)』로 이어진다. 관능적 매력뿐 아니라, 이처럼 풍부한 기록과 함께 한반도 복숭아의 연대기는 면면하다. 그 속에 현대 한국 복숭아가 자리한다.